UN은 한 국가의 총인구 중 65세 이상이 7% 이상이면 ‘고령화사회’, 14% 이상은 ‘고령사회’, 20% 이상은 ‘초고령사회’로 구분했다. 사회보험의 재정고갈 위험 때문에 ‘고령사회’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의료 서비스와 사회복지 시스템이 안정화될수록 고령 인구 증가는 부정적인 현상이 아니라 당연한 추세에 불과하다.
스웨덴, 독일, 영국, 프랑스는 일찌감치 1970년대에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했고, 호주나 미국 같은 이민자들의 국가도 2010년대 초에 ‘고령사회’로 편입됐다. 우리가 아는 다수의 선진국들이 ‘고령사회’인 셈이다. 한국은 2017년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통계청 KOSIS 인구추계 데이터를 살펴보면, 2023년 현재 한국 총인구는 5155만8034명이고 이중 65세 이상은 949만9933명으로 전체 인구의 18.43%가 넘는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인을 나이순대로 줄 세우면 가운데 사람은 43.7세다. 이것을 ‘중위연령’이라 한다. 한국식 나이로는 46세 정도가 현재 한국인의 평균 나이다.
어쨌든 한국사회는 늙어가고 있지만 적어도 한국인의 외모는 시간을 거스르고 있다. 1980년대 영상 속 30대가 지금 40대보다 더 노숙하다. 2023년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체로 동안을 갖고 있고, 나이 그대로 보이는 이들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다. 가끔 제 나이로 보이는 이에게 “어디 아프셨냐”고 되묻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이제 우리는 제 나이로 보이면 병을 의심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길어진 수명만큼 중년 이후에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며, 제2 제3의 직업을 찾는 경우가 늘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정언명제가 됐다. 그러나 나이가 왜 숫자에만 불과하겠는가.
제도적으로는 선거권과 피선거권, 음주 및 흡연의 무방성, 병역 대상 여부, 연금수령 시기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나이다. 범죄를 저질러도 만14세 미만은 ‘형사미성년자’로, 처벌을 받지 않고 보호처분에 그친다. 그러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틀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나이를 숫자에 불과하게 만드는 ‘노추(老醜)’에 있다. 나이만 먹었을 뿐 어른으로서의 품격과 포용,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갖추지 못한 채 외적 추레함과 완강한 권위의식, 미약해진 신체기능과 대비돼 더욱 도드라진 육체적 욕망이 결합되면, 견디기 힘든 불쾌함을 사방으로 뿜어낸다.
이런 이들은 대체로 “나이보다 젊어 보이지 않냐”고 주변사람들에게 이미 답이 정해진 질문하기를 즐긴다. 착하게도 대부분 “그렇다”고 대답해주지만, 진짜 젊어 보이면 구태여 이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다.
또한 젊은 이성을 향해 무모한 성적 어필과 상대방 외모를 품평하는 무례를 습관적으로 저지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이만 들 뿐 정신적인 퇴행을 겪고 있는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 끝없는 추함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화를 신의 저주로 여겼다.
노화하는 인간과는 달리 가재나 게, 새우 같은 갑각류는 탈피로 외양을 바꿔가며 계속 성장할 수 있어서, 외적인 위험만 없다면 탈피를 통해 꾸준히 크기를 키우며 영생도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인간도 대략 35일 주기로 피부세포가 죽어 각질로 탈각되는 과정을 거치지만, 외연 전체가 일시에 ‘환골탈태’하는 갑각류의 탈피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갑각류의 탈피는 극단적인 고통과 위험을 수반한다. 무척추동물은 중추신경계나 뇌가 거의 발달하지 않아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중추신경계가 없는 갑각류나 연체동물들도 고통에 반응한다는 연구들이 나오면서, 2018년 스위스를 시작으로 노르웨이, 뉴질랜드, 호주, 영국 등에서는 갑각류를 살아있는 그대로 요리하는 행위가 불법이 되었다.
굳이 과학적 실험이 아니더라도 고통 없는 존재라는 것이 어디 가능할 일인가. 모든 존재는 고통을 동반한다. 갑각류의 탈피란, 지금껏 존재의 보호막에서 속살을 뜯어내 빠져나오는 과정을 포함한다. 탈피가 진행되는 동안 먹지도 숨 쉬지도 못한 채로, 표피와 속살을 분리하는 고통을 마저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분리에는 성공했지만 껍데기에서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해 죽는 경우도 많다.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던 보호막이 이제 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 되어 반드시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야만 살아날 수 있는 존재적 딜레마. 그럼에도 갑각류의 탈피는 지금까지의 ‘나’에서 빠져나와 단절적인 더 큰 ‘나’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이 과정은 인간의 정신적 성장과 닮았다.
인간의 가치는 산화되는 육신이 아니라 인간 각자의 정신에 깃든 자유의지에서 나온다. 선택의 순간에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바대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 자유의지다. 외적 위협이나 불리에도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지킬 때, 한 인간의 정신은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부여받는다. 정신은 언제나 외적 위협을 견디면서 체급을 올린다.
반대로 목전의 이익을 위해 신의를 저버리고도, 유체이탈 화법을 써가며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자아분열적 합리화를 하는 순간, 그가 진정 내버린 것은 자신의 인격적 품위와 존엄이다.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이용자들과 투자자들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기업은 가치를 가질 수 없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많은 블록체인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직면한 진정한 위기는 투자 빙하기가 아니다. 눈앞의 이익에 눈멀어서 사용처도 없는 코인을 방대하게 발행해서 투자자들과 시장에 팔아재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합리화와 “다들 그렇게 한다”는 성급한 일반화로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남의 것인 양 하는 몰염치함이다. 기술의 방향성과 서비스의 지향점이 사라진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고, 그들이 발행한 코인이 가치를 가질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안된 것은 그 코인에 투자한 토큰홀더들뿐이다.
올해는 각국의 역내규제가 한층 강화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블록체인 기업들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 탈피의 과정이 끝나면 지금까지와는 급이 다른 유용성과 편의성으로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내는 프로젝트들이 등장할 것이다. 이제 막 탈피를 끝내고 살아남은 바닷가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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