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국내 블록체인 산업의 가장 큰 이슈는 암호화폐 공개(ICO, Initial Coin Offering)의 합법화 여부였다. ICO 허용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의 분리대응 정책을 취해온 정부가 암호화폐 산업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준다는 의미로, 코인을 발행하는 기업이나 코인을 유통하는 거래소 모두에게 절실한 현안이었다.
국내 ICO 허용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기업들이 해외에서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하는 현지 인력들의 인건비를 비롯한 재단 운영비, 각종 행정·법률 서비스 비용, 환전 수수료 등의 지출 절감이다. 둘째, ICO 프로젝트 추진 실무진과 댑(Dapp) 개발자 등의 직접고용이 이뤄지고, 행정·사무·법률 등 제반 서비스 분야에서 다양한 간접고용 발생으로 인한 고용 창출 효과다. 셋째, 해외 재단과 국내 기업의 물리적 거리에서 발생하는 시간 지체 감소로 운영의 효율성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이외에도 개별 기업의 기술 노하우 및 경영기밀 누설 위험 감소, 해외재단과 국내기업 간의 분쟁 차단 등도 부수적인 이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지난 1월 31일 투기 과열 현상의 재발 방지와 투자자 피해를 막기 위해 ICO 전면금지의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다. 기업과 거래소 현장의 실망은 크겠지만 정부가 우려하는 것처럼 건전한 기업의 ICO와 사기성 ICO의 구별이 쉽지 않고, 기술기업의 ICO라고 하더라도 기업의 건전성과는 무관하게 사업 성패를 예단하기 어려워 투자 위험이 큰 것도 사실이다.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ICO가 모금의 편의성만 가졌을 뿐 투자자 보호 장치가 미비하다는 점과 코인 소유자의 권리가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주식이 발행기업의 경영권 참여, 이익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담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ICO를 통해 발행하는 코인은 해당 블록체인 네트워크 안에서의 서비스 이용권으로서의 기능 이외에는 법적으로 아무런 권리를 보장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이미 ICO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에서 ICO 규제 논의가 새롭게 제기된 배경에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ICO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작년 하반기부터 STO(Security Token Offering)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STO를 통해 토큰도 증권처럼 투자자 보호를 위한 법적 책임과 의무를 명확하게 하자는 것이다. 미국, 스위스, 싱가포르 등 ICO 선진국에서는 증권형 토큰은 증권법의 적용대상이라는 것을 초기부터 명확히 했던 만큼 이제 ICO 대신 STO가 대세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국내에서도 STO 전담팀을 꾸린 법무법인과 거래소도 등장할 만큼 국내외 관심이 높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STO은 잠시 동안의 유행으로 ‘반짝’ 하고 말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STO가 금년도 암호화폐 시장의 대세가 되기 어려운 요인은 대략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ICO로 유입되는 투자금 자체가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체인파트너스에 따르면 작년 하반기 ICO를 통한 월평균 조달액은 2억 7000만 달러로 상반기의 4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투자자들이 투자 규모가 급격하게 줄어든 데에는 블록체인 기술의 한계를 인식했다는 점이 크다. 작년 초 블록체인 기술은 모든 산업과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마법처럼 여겨졌지만, 1년이 지난 지금에는 블록체인 기술에 적합한 분야가 더욱 명확해졌고 수익성을 고려할 때 더 제한적인 영역에서만이 블록체인 기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산원장으로 데이터베이스를 저장할 때 블록체인 기술은 기존 기술보다 비싼 비용을 지급해야 하며, 트랜잭션 속도의 제한도 큰 맹점으로 작용한다. 블록체인 분야에 대한 투자가 활성화된 상황에서는 ICO로 투입될 돈이 STO로 방향을 바꿔 흘러 들어가겠지만, 블록체인 산업에 대한 투자 자체가 줄어들었다면 ICO가 STO로 바뀐다고 해서 투자가 늘어나기는 어렵다. 투자의 목적은 수익인데 수익에 대한 기대가 떨어졌다면 ICO든 STO든 투자대상으로서 매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둘째, STO가 ICO가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증권형 토큰과 전통적인 유가증권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증권형 토큰에 대한 대략적인 정의는 미국 Howey Test를 통해 제공되고 있지만, ICO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준들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유가증권과 STO의 증권형 토큰과는 어떻게 다른지, 증권형 토큰의 법적 권리는 무엇인지, 주식회사의 증권형 토큰과 주식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등이 명확하지 않다. 일정 기간 후 주식으로 교환되는 전환형 토큰 공개(ICCO)의 경우 토큰이 주식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기존주식의 지분 희석이 발생하는 데, 이를 기존 주주들이 동의할 것인가와 전환에 대한 의결과정 및 지분가치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제공되어야 하는데 이런 절차적인 구체성이 미비하다. 향후 미국 SEC에서 발표하는 증권형 토큰의 세칙이 국제기준으로 통용되겠지만, 당장 STO가 ICO를 대체할 규제적 역량은 없다.
셋째, 산업의 급격한 변화로 법리적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데 축적된 판례가 거의 없다는 점도 큰 문제다. 증권법의 적용대상이라고 해도 전통적인 유가증권과 증권형 토큰은 같은 법리적 적용을 하기는 어렵다. 큰 틀에서 증권법에 ‘준해서’ 적용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법리적용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판례뿐인데, 증권형 토큰과 관련된 법률적 경험치가 너무 적다는 사실은 STO를 통해서도 상당한 법률적 논쟁과 이견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윙클보스 캐피탈의 파트너인 스털링 위즈키(Sterling Witzke)가 미국 내 규제 명확성 결여와 적절한 보안 조치 부재를 이유로 기관투자자 유입이 당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타당하다. 더구나 관련 기업들뿐만 아니라 의회나 정부에서도 블록체인 산업 육성을 위해 조금의 융통성 발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만큼 기존 유가증권과는 다른 적용의 ‘묘’가 필요한,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은 대상(似而非)"으로 새롭게 규정될 가능성이 크다.
STO 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STO의 적용대상을 명확히 해야 한다. 암호화폐는 투자를 통해 자산증식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금융상품의 특성과, 물품이나 특정 서비스와의 교환이 가능한 지급수단으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 전자는 증권형 토큰으로, 후자는 지불형 토큰과 유틸리티 토큰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사실 양자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제이 클레이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의장이 "비트코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암호화폐는 유가증권에 해당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증권형 토큰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제시하지 못한다면 STO 역시 한때의 유행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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