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복수극의 시대다. 국내외 주요 OTT 순위권 인기 드라마 대부분이 복수극이다. 재벌가 뒤치다꺼리를 하다 살해당한 뒤 그 집안 일원으로 환생하거나, 학교폭력 피해자가 일생을 걸고 가해자를 응징하는 서사에 국내외 시청자들이 연일 열광하고 있다.
이 열광이 진정 의미하는 바는 응징하고 싶은 인간을 가진 이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반증이 아닐까. 평범해 보이는 이들조차 일상 속 소소한 부당함과 불공정, 불합리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을 켜켜이 쌓아놓고 산다. 이런 분노와 배신감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신을 미워하며 자책하면서.
그러나 사람은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삶의 주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의 삶에는 그의 역량 밖에 존재하는 많은 외생변수가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출생과 함께 결정되는 가정환경과 지능, 외모, 체력, 신체능력을 비롯해 유전적 소인에 의한 병력이 있다. 이는 부모의 몫이지 본인의 선택 영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아이가 모두 선량한 어른으로 자라나지 않는 것처럼, 즐겁지 못한 성장 환경에도 바르고 강건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가다듬고 성장한 이들은 많다. 엘리트 부모의 아이들이 모두 우등생이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움이 길지 못한 부모를 한계 삼지 않고 세계적인 학자가 된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계속 등장한다.
타고난 유전적 요인을 일상 속 노력과 관리로 꾸준히 향상시켜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더디지만 지속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전의 동력도 앞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의 다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문제는 부모의 문제를 알면서도 답습하거나 더 나빠지는 이들이다. 가족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욕설을 퍼붓던 부모를 저주하면서도, 자신 역시 가정 내 폭군이 되는 어른은 의외로 많다. TV 관찰예능이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인터뷰 대상자는 가정 폭력으로 얼룩진 본인의 성장기를 비탄해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정에서 폭언과 폭력을 가하고 있다. 오로지 본인만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방향만 바뀌었을 뿐 양면이 동일한 데칼코마니 같은 지옥도에서, 삶의 반쪽은 피해자로 다른 반쪽은 가해자로 역할만 바뀐 아이러니가 그 가계(家系)의 비극적 특징이 된다.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만 나쁜 부모는 아니다. 도덕과 양심이 부재(不在)한 삶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부모 역시 인간의 신뢰를 허물어뜨리고 사회적 악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철저한 악이다. 아니, 폭력과 폭언보다 밖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인간과 사회의 심연에 저지르는 해악은 그들이 더 크고 무겁다.
사기와 절도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던 아버지와 절연한 아들 역시 빌린 돈을 갚지 않을 거짓말과 방법을 모색하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기만한다. 이제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자신의 부친을 닮아가며 몰염치와 무도덕(無道德), 배신의 프로그램을 유전자 깊이 남김으로써 대(代)를 이어 사기꾼이 된다. 유전이 외모뿐 아니라 심성에도 많은 족적을 남기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에게도 아들이 있다. 이제 그의 아버지가 그러하였듯이, 그 역시 자신의 아들에게 본인의 실체를 발각당할 일만 남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그의 아들도 사기꾼이자 범죄자인 아버지를 일생의 수치이자 평생 숨기고 싶은 상처로 여길 것이다. 신이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는 사기꾼의 아들로 태어나 사기꾼 아버지로 거듭났고, 그의 아들 역시 대를 이어 사기꾼인 부모를 수치스러워하는 고통을 떠안고 살게 될 것이며, 자식의 고통은 다시 그의 고통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는 신의 몫이자 시간의 역할이다.
새해가 되고 가상자산 가격이 다시 오르고 있다. 가상자산 가격이 떨어질 때조차 사기꾼들은 쉼 없이 선량한 사람들이 평생 일군 자산을 강탈해 갔지만, 가상자산의 가격이 오르면 피해자는 더 빨리 늘어난다. 곧 전 세계적으로 다시 스캠 코인과 사기성 거래소의 공모로 인한 피해자가 늘어날 것이다.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감으로 지인의 추천을 믿고 투자했다가 곧 크나큰 손실의 고통으로 빠져든 피해자의 잘못은 나의 고민을 남이 대신해줄 것이라는 안일함과 욕심이 전부였겠지만, 죄가 가볍다고 감당해야할 고통이 줄지는 않는다. 그러니 어떤 종목이든지 모르면 그냥 투자하지 않기로 하자.
그렇지만 이미 모든 사건이 종료된 이후 당신이 오로지 피해자일 뿐이라면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시간이 걸릴 뿐 죄는 반드시 값을 청구 받는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인류 문명만큼 긴 시간에 걸쳐 도출된 통계학적 진리니,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는 현장을 기꺼이 목도하는 즐거움을 위해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지켜보자. 신의 존재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복수극의 성공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