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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최화인

[EBN 칼럼] 인간답게 사는 법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칼럼을 쓸 때마다 내 머리 속 핵심 키워드는 ‘블록체인’이나 ‘기술’이 아니라 ‘인간’과 ‘존엄’이다. ‘가상자산’으로 육화(肉化)된 무형의 기술이 그간 빨아들인 돈과 빨아들이고 있는 돈, 그리고 빨아들이게 될 돈. 그 돈의 근저(根底)에 인간의 존엄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7, 8년간 사기성 코인에 자산을 탈취(奪取) 당한 이들의 경제적 기반과 인격적 존엄이 나란히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는 사례를 무수히 보았다. 처음에는 예상치 못했던 불의(不義)에 급습당한 이들을 향한 인간적 연민으로 괴로웠다가, 언제부턴가는 그들의 불행이 그들 스스로 자초한 어리석음의 결과로 보이기 시작했다.


가진 돈에 대출까지 몽땅 끌어 코인을 샀다가 뒤늦게야 사기임을 깨닫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하는 피해자들을 보면서, 어느 순간 ‘도대체 저런 사기에 왜 당하는 것일까?’라는 ‘객관성’을 가장한 ‘오만함’으로, 마치 그 모든 범죄의 책임이 피해자들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있다는 무의식적이고도 기계적인 확신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죄악이다.


피해자가 어떤 실수를 했든지 간에 가장 정확한 사실은 피해자는 가해자의 치밀하고 의도적인 악의에 공격당한 ‘희생자’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에게 “너도 잘못이 있으니 그런 일을 당했다”라는 비난은, 이미 지옥 한 가운데 들어선 가여운 영혼을 향한 자비심 없는 돌팔매질이자, 그 삶을 멈추게 만들려는 절대적 악의에 죄의식 없이 동참하는 비열한 행위다.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의 책임과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결단코 객관적이거나 공정하지 않다. 우리가 아주 쉽게 ‘객관적’이라고 함부로 확신하며 들이대는 ‘공정’이라는 잣대가, 실은 전혀 객관적이거나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본인 스스로 피해자가 되어 보면 안다. 비웃던 이들과 같은 처지가 되고 나서야 그간 아무 죄책감 없이 손가락질하며 희롱하던 타인의 불행이 얼마나 극악한 고통이었는지, 그리고 현재의 불행과 고통을 원해서 짊어진 이는 아무도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깨달음이 오기 전까지, 즉자적(卽自的) 상황에서는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재단하고 평가하던 엄중함과 냉철함을 말끔히 증발시켜 버린 채로, 다른 이의 이름으로 제출해도 되는 방학숙제처럼 부담감 없이 자신의 일상을 대충 채워 나간다.


내밀히 엄습해오는 부끄러움과 죄의식 위에 ‘인간이면 그럴 수 있지’와 ‘몰라, 어쩌라구......’를 열심히 덮어쓰며 지내다보면 그럭저럭 견딜 만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현자타임이 찾아들면, 열정 없는 내 일상이 부끄럽고 쪼그라든 내 모습이 초라해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짊어진 존재적 버거움을 쏟아버릴 하수구로 누군가를 선택해, 그에게 내 일상의 모든 부끄러움과 비난을 죄책감 없이 쏟아낸다. 이것이 인간이 고통에 허덕이는 다른 인간을 더 지독한 지옥으로 밀어 넣는 이유다.


나 역시 썩은 씨앗을 심은 줄도 모르고 정해놓은 일자마다 물을 주고 볕 좋은 곳에 내다놓은 화분을 돌보듯이, 내 삶을 애틋하게 살피며 사랑하고 있다 착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열심히 보살폈던 내 삶이 사실은 잘 살아있는 척 하는 ‘무엇’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면서, 그간 내가 느꼈던 감정 역시 스스로의 마음 한 가운데서 피어나는 순순한 기쁨이나 분노, 슬픔, 좌절이 아니라 무언가를 통해서 비춰진 타인의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곧 지독한 무기력감으로 이어졌다.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원치 않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었다. 완벽히 무기력감에 압도당한 시간들이었다.


“힘내”까지는 아니어도 “힘내자” 정도는 말할 수 있어야 했는데, 마음속에 들리는 말은 온통 “힘들어”뿐이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다가 아예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눅진하게 침대에 눌러 붙어 아무리 애를 써도 일어날 수 없는 순간들로 꽉꽉 눌러졌다.


한참을 그러다 문득 어느 때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꾸물거리게 되었고, 꾸물꾸물 하다가 부지불식중(不知不識中)에 일상으로 되돌아와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참으로 기이하게도 내 삶에서 가장 철저히 무기력했던 시간들이 내 존재로부터 잠시 놓여날 수 있었던 방학 같은 시간으로 치환(置換)되어 받아들여졌다.


못난 대로의 나를 거부감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면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마음의 크기도 함께 커진 느낌이랄까.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했던 미움과 원망, 후회가 쑥 빠져나간 것 같은 편안함이 찾아왔다.


여전히 나는 못나고 찌질한 내가 버겁고 부끄러워지는 순간들을 맞이한다. 동시에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한다. 내가 모자람만큼 남의 모자람을 이해해주고 싶고, 내 잘못을 용서받고 싶은 만큼 타인의 잘못도 용서하고 싶다. 내가 인간답게 살고 싶은 만큼 타인도 인간답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그 자체가 삶이다. 그만두고 싶다고 멈춰버린 뒤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그 존재는 더 이상 어떤 형태로도 다시 살 수 없다. 살아있는 동안에만 계속 살아있을 수 있다. 단 한 번의 멈춤이 발생하면 더 이상 그 존재는 이어질 수 없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지켜져야 한다. 부단히 나와 타인의 존재를 지킬 때만이 인간은 오롯한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최화인 초이스뮤온오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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