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외로움은 솔직하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러워 찾아온다.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언어로 “내가 옳다”, “나는 잘못이 없다”고 완강히 바투지만, 끝끝내 속아지지 않는 자신의 비겁함과 거짓됨을 홀로 마주해야 하는 순간, 거칠고 극렬(極烈)한 고립감이 찾아든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옳고 그름을 재고(再考)해보기보다는, 어떻게든 조속히 고립된 ‘나’를 구출하고 다시금 마음의 평안을 얻어야 한다는 조급증이 앞서서 “난 잘못이 없다”고 한층 높은 목소리로 나에게도 남에게도 울부짖듯 강변해보건만 속아주질 않는 스스로로 인해 부끄러움만 커질 뿐이다.
한번 정체를 드러낸 부끄러움은 불가사리처럼 이내 내면의 모든 감정들을 빨아들이며 어지러울 정도의 속도감으로 커질 뿐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판단능력이 기능하는 이상, 촘촘하고 구체적인 자기기만(自己欺瞞)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내 안의 ‘무엇’이 남아, “옳다”고 우기는 ‘나’와 “틀리다”고 인정하고 싶은 ‘나’ 사이의 갈등을 쉼 없이 부추긴다.
일단 “옳다”는 ‘나’와 “틀리다”는 ‘나’ 사이에 충돌이 발발하면, 자아는 파열음을 내며 격렬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을 시작한다. 그 싸움판 어딘가에 완전히 버려진 채 안절부절 못하는 존재적 ‘나’가 숨을 꼴깍거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끄러움이 파생시킨 복잡 미묘한 개개의 감정들은 모두 내 한 몸에 올라탄 채 파멸의 낭떠러지를 종착역 삼아 폭풍 질주한다.
무엇이 이 미친 감정의 질주를 멈추게 할 것인가.
솔직해지기를 포기한 내 거짓과 잘못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어서 오롯이 홀로 마주해야 한다. 극심히 부끄럽고 심각히 외로워진 마음은 이미 지옥 불구덩이 한 가운데 던져졌다. 그 사이 각개전투를 거듭하던 여러 감정들은 불벼락에 전신화상을 입은 것처럼 마침내는 개개의 형체를 잃고 한 덩이로 달라붙어 원래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판독 불가 상태에 빠져버린다.
부끄러움에서 출발했던 감정이 종국(終局)에는 외로움으로 남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맞아주는 이 없는 무연고자의 죽음처럼, 스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비겁함과 거짓에서 촉발된 부끄러움은 의식과 감정의 극단을 오가다 결국 덩어리진 존재적 외로움으로 변환된다.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이 커졌다면 사실 그건 외로운 게 아니라 그만큼 솔직하게 살고 있지 못한 탓일 가능성이 크다. 외로움의 무게는 속아주지 않는 내 안의 ‘무엇’이 만들어낸 부끄러움의 무게를 추종(追從)한다. 그래서 극심히 외로운 날은 극심히 부끄러운 날이기도 하다.
두렵게도 외로움의 실체를 파악했다고 해서 외로운 날이 줄어들지도 않는다. 음습한 마음 한 가운데 아무도 모르게 무거운 추를 달아 간신히 가라앉힌 내 잘못과 거짓됨을 도로 끄집어 올려 토끼의 간처럼 볕 좋은 바위 위에 널어 말릴 용기가 좀처럼 나질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혼의 눈이 번쩍 뜨인 어느 하루 뼈를 깎는 자아비판과 대오각성(大悟覺醒)의 자아성찰로 밤새워 반성해 본들 얼마지 않아 또 다시 원점에서 버겁게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는 ‘자기기만 후 뉘우침’의 무한 루트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질 못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이상 부끄러움은 끝이 없고, 외로움도 끝나질 않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나는 후회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꿔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인간은 후회를 존재의 전제(前提)로 삼는다. 그리고 후회는 늘 부끄러움과 외로움을 달고 온다.
철학의 연원만큼 오래도록 인간이 인간에게 “왜 살아야 하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한 이유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짊어져야 하는 부끄러움과 외로움이 너무 깊고 커 도저히 한 인간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이기에 다 함께 나서 답을 찾아보려는 간절함에 있다.
그러니 존재의 소멸 이외 탈출구를 찾을 수 없다. 자각되는 심연(深淵)의 부끄러움과 외로움의 바닥으로 추락할 지라도, 결코 존재하기를 그만둬서는 안 된다. 끝 모를 캄캄한 터널 속에 홀로 버려진 채,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졌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마저 갈기갈기 찢겨지는 순간이 닥쳐오더라도, 보이지 않는 길을 손으로 더듬고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길을 찾아 살아남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삶이 남루(襤褸)하고 구차(苟且)하다고 느낀다면 그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남들은 모르는 구차함에 흥건히 젖은 채로, 홀로 통곡하며 견디는 시간을 배당받는다. 감히 단언컨대 존재했던 그 모든 인간들은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은 자신을 간신히 견디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이미 수세기 전부터 철학자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왜 살아야 하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어왔다는 사실(史實) 자체가, 역사에 오래도록 이름을 남긴 그 위대한 철인(哲人)들 조차 살아 있는 동안은 죽음의 위기를 오가는 극심한 구차함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적 부끄러움과 외로움을 감당하려 극렬히 싸워왔음을 말해주는 바 아니겠는가.
허나 인간이라서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외롭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한 뒤라야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처럼 ‘나’의 비겁함과 거짓을 있는 그대로 인정(認定)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뒤에라야 구차하고 비루하게라도 살아내고자 몸부림치는 ‘나’를 나직하고 따뜻하게 봐줄 수 있는 용서의 힘이 내 안에서 생겨난다.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프로그래밍 언어는 이진법에 기반한다. ‘0’과 ‘1’로만 이루어진 이진법의 위대함은 ‘2’ 없이도 자리수를 올림으로써 ‘2’를 표현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데 있다. 어디 ‘2’뿐이겠는가. 어떤 큰 수라도 계속해서 자리수를 올려가며 ‘0’과 ‘1’만으로 모든 수를 표현해낸다.
삶도 마찬가지다. 멋지고 잘나서 존엄하고 거룩한 게 아니라, 비루함과 부끄러움, 외로움 같은 온갖 고통의 언어들로 채워진 삶일지라도 함부로 내려놓지 않고 초라하고 남루한 ‘나’를 끈질기게 버텨냄으로써 체급을 키우듯 자리수를 올려가며 존엄하고 거룩해진다. 그것이 생(生)의 이진법(二進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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