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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최화인

[EBN 칼럼] 기술이 인간을 찾아오리라



기술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할까. 대답부터 하자면 그렇다.


컴퓨터의 작동원리를 몰라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고 OS(Operating System. 운영체제)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휴대폰과 태블릿 PC 사용에 어려움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한때 나는 이용자에게 기술에 대한 이해를 강요하는 것은 기술자 중심의 ‘지적 폭력’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다. 기술의 특성과 원리를 이해해야 하는 고단함을 이용자에게 요구한다면, 그 기술은 실효성 있는 서비스가 없거나 서비스 구현 방법이 엉망이라서 되레 이용자에게 “나를 알라”고 요구하는 것이라 여겼었다.


이 생각이 바뀐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기술의 작동 방식과 운영 프로그램이 인간의 행동과 사고, 사회적 효율성과 시스템에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례들을 일상에서 아주 빈번하고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됐기 때문이다.

길을 걷거나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각자의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사람들의 시선은 각자의 휴대폰 화면에 집요하게 머문다. 일상에서의 모든 행위를 휴대폰 화면과 함께하는 ‘화면중독’이 일반화되면서, 천만년 전 땅으로 내려와 직립 보행을 시작했던 인류는 20세기를 인간 진화의 정점으로 삼아, 다시 역(逆)진화의 단계에 돌입해 언젠간 스마트폰을 든 채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갈 것처럼 급격한 신체적 퇴행이 일어나고 있다.


자각하지 못했을 수 있겠지만 이미 등을 펴고 반듯하게 의자에 앉아 있거나 머리에서 발 끝까지 꼿꼿하게 서 있는 사람을 ‘멸종 위기종’에 지정해야 할 만큼 완벽한 직립을 유지하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는 드물어졌다. 나를 포함해 내 주위 거의 모든 호모 사피엔스들은 의식하지 않은 상태이거나 혹은 의식을 하고서도 자라처럼 목을 빼고 안으로 말린 어깨를 한 채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거나 반듯한 직립으로 걷지 못한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지적한 대로 이제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뜻의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지혜가 있는 전화기”라는 의미의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는 신인류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포노 사피엔스’는 휴대폰 없이 일상의 어떤 행위도 하기 어렵기에 운전 중에도 채널을 바꿔가며 흥미 있는 동영상 콘텐츠를 찾거나 수시로 문자를 확인한다. ‘포노 사피엔스’가 운전 중인 택시를 타면 승객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멀티태스킹을 그만두고 운전만 하기를 원한다는 직접적인 의사 표명이다. 정당한 승객의 권리와 교통안전의 측면에서 가장 합리적 선택이지만, 실행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기사가 응하지 않을 경우 불쾌한 말싸움으로 이어질 가능성과 기사가 응한다고 해도 목적지까지 불편한 동행을 감내해야 한다는 단점이 커서 쫄보들에겐 쉽지 않다.

두 번째는 속으로 무사도착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면서 동영상 시청에 몰두한 운전자 대신 바뀌는 교통신호나 방향 선회 지점을 실시간 확인해 안내해주는 방법이 있다. 첫 번째 선택보다 갈등 유발의 가능성이 낮고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내 돈 내고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자괴감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은 승객 역시 빨리 휴대폰을 꺼내 카톡으로 지인(知人)에게 기사의 운전 태도를 욕하는 한편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현재의 물리적 위기를 잊고 위안이 될 만한 게시물과 영상을 찾아 즐기는 방법이다. 이는 운전자와 탑승자 모두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위험을 ‘함께’ 감수하면서 디지털 속 즐거움에 같이 탐닉하는 ‘기괴한’ 평등과 자유의 시대를 받아들이는 ‘포노 사피엔스’ 시대의 새로운 수용적 자세이기도 하다.


신인류의 시대에 변한 것은 체형과 자세, 행동 방식만이 아니다. 정보의 해독력과 집중력, 인지적 역량 역시 달라졌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평균적으로 10초 이내에 웹 페이지를 바꾸고,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하루에 평균 150번 이상 스마트폰을 확인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올 만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스마트폰 이용자 모두 어느 정도 디지털 중독 증상이 있다.


디지털 중독이 심하면 먹거나 자거나 쉬거나 일하거나 깨어 있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 잠시간의 공백이나 심심함도 견디질 못한다. 그래서 손이 자유로울 땐 화전민처럼 수시로 사이트를 옮겨 다니며 핫이슈와 커뮤니티 게시글들을 검색하고, 손이 자유롭지 못할 땐 재미있게 봤거나 재미있을 법한 동영상이라도 찾아 틀어놓는다.


깨어 있는 시간 내내 디지털이 병행되는 삶은 ‘지루함’ 혹은 ‘사색(思索)’이라는 용어로 정의되던 의식의 빈 공간들을 증발시켜 버리기 때문에, “요점만 간단히” 를 요구하는 인정머리 없는 상사처럼 인간의 뇌 역시 짧은 재미만 가득한 콘텐츠를 찾아 게걸스럽게 작동한다.


그 상태가 일정 시간 이상 지속되면 길이와 분량이 많은 텍스트, 은유적이고 내포적인 메시지는 소화하질 못하는 문해력 저해가 심화된다. 각종 커뮤니티 게시글과 기사, 영상 정보 하단엔 언제나 “세 줄 요약” 요구와 본문은 읽지 않고 달린 댓글, 텍스트를 오독한 댓글, 관련 내용과 상관없는 기계적 비난 댓글들이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짧고 쉬운, 빠르고 강렬한 재미에 중독된 뇌가 지루함을 견디며 행간의 의미를 곱씹어야 하는 콘텐츠를 더 이상 감당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존재에 대한 실존적 수용과 통찰, 타인에 대한 포용과 소통 역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로, 철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존립 기반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현상의 기저(基底)에는 디지털의 작동 메커니즘이 있다. 전직 페이스북 부사장 차마트 팔리하피티야는 페이스북이 이용자의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도파민에 의해 작동하는 단기 피드백 순환고리”의 알고리즘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고기를 구매한 고객에겐 고기와 햄·소세지 같은 육가공 식품만을 추천하고, 샐러드를 샀던 고객에겐 채소와 과일, 드레싱만 권유하는 판매자처럼, 모든 디지털 플랫폼은 이용자가 소비했던 정보를 데이터 삼아 유사한 콘텐츠 소비를 권유하는 알고리즘이 있다.


이용자는 알고리즘이 찾아주는 대로 본인의 콘텐츠 편식을 자각하지 못한 채 유사 콘텐츠만 반복 소비하면서‘성향(性向)’을 ‘편향(偏向)’으로 굳혀 나간다. 그리곤 마침내 디지털이 작동하는 방식 그대로 ‘0’과 ‘1’로 구분되는 극단적으로 선명한 이분법을 수용하여 사고하게 된다. 알고리즘 기술이 인간에게 선택적으로 정보를 주고 인간의 인지방식을 길들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물리 세계에서는 ‘0’과 ‘1’의 두 정수 사이에는 무한한 소수(小數)들이 존재하며, 양자 컴퓨터로도 이를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현상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디지털의 ‘0’과 ‘1’로만 치환해서 이해하도록 강제된 구조는 디지털 알고리즘이 인간에게 가하고 있는 ‘드러나지 않는’ 폭력이다.


기술의 성장으로 인간에게 ‘강제된 자발성’과 ‘드러나지 않는’ 구조적 폭력이 증가하고 있다면, 『과학은 이것을 상상력이라고 한다』의 저자 이상욱 교수의 말대로, 기술의 개발 및 설계 단계에서 그 문제점을 예방하려는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디지털 콘텐츠 소비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나면 물리 세상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고갈되어 버리기에, 기술로부터 쉴 수 있는 시간 역시 충분히 남겨두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찾아와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을 찾아가 이용할 때만이 인간이 기술을 방편으로 사용하면서도 기술의 방편으로 소모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자율적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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